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28 사건 (문단 편집) == 기타 == * 사건의 원흉 중 하나인 타이완 성 행정장관 [[천이(1883)|천이]]는 사건 이후 해임되었다가 1년 뒤인 1948년에 [[저장성]] 정부 주석으로 다시 등용되었는데 [[국공내전]] 도중에 [[중국공산당]]에 투항하려고 했다가 발각[* 자신의 옛 부하이자 장제스의 심복인 [[탕언보]](湯恩伯)에게 같이 투항하자고 권유를 했는데 탕언보가 장제스에게 밀고해 버렸다. 다만 탕언보가 '밀고'했다기 보다는 '장제스도 천이를 잘 아니 좋은 말로 타이르겠지' 정도로 생각했다는 견해도 있다. 이 일로 탕언보는 한때의 후견인인 천이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되어서 1949년에 체포되었고 1950년에 자신이 사고를 쳤던 바로 그 타이완 땅에서 처형되었다.[* 원한관계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다른 견해도 있는데 [[http://blog.naver.com/shanghaicrab?Redirect=Log&logNo=20190806262|여기]]를 참조해 봐도 좋다.] * 2016년 5월 20일 차이잉원 총통의 취임식 식전행사로 대만 역사를 요약하는 무용이 공연되었는데 2.28 사건에 대한 묘사도 포함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eyeseenews.com/l_eyeseenews-838090934573ece88894f8.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chinatimes.com/n25a00_p_02_01.jpg|width=100%]]}}} || * 희생자 중엔 일본인, 한국인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대만의 일본인들이나 기타 일제 식민지인들의 귀환은 1949년에야 완료되었는데 미처 일본 등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2.28 사건에 휘말려 희생된 것이다. [[지룽]]에 거주하던 박순종과 기타 선원 2명 등 한국인 3명도 국민당군에 의해 끌려가서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피해 사실을 인정받아 보상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http://m.news.naver.com/read.nhn?oid=001&aid=0009065164&sid1=104&mode=LSD|#]][* 해당 기사에서는 2.28 사건을 '[[대만 원주민]]에 대한 학살'로 서술했지만 아직까지 대만 원주민으로 일컬어지는 대만인들은 인구 비율상 극소수로 산간지대에 거주하고 있으며 2.28 사건의 피해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대만인은 오래 전부터 중국 대륙 복건성과 광동성에서 이민 온 자들로, 현재 대만의 소수민족으로 규정된 오스트로-미크로네시안 계열의 대만 원주민과 별개로 구분된다. 물론 명확한 집계조차 안 되는 실정이니 대만 원주민들도 학살당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고 일제강점기에 그나마 중국적 문화가 있었던 대만 본성인들보다 더 일본 황민화가 진행된 집단으로 일본군에서도 대만 원주민들로만 구성된 특수부대를 남양 최전방에서 운용하면서 대대적으로 선전했으니 대만 본성인과 마찬가지로 친일파로 몰려 학살당한 사례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인구 비율상으론 2.28 사건 당시 대만 본성인들이 이미 원주민을 대체한 주류 거주민이긴 하다.] * 본토에서 떨어진 바다 건너 섬에서의 학살 사건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제주 4.3 사건]][* 특히 2.28 사건 바로 다음 날 제주도에서 4.3 사건의 발단이 되는 사건인 3·1절 발포 사건이 일어났다.]과 비슷한 사건이라 그런지 관련 기념재단 및 단체와의 교류도 많은 편이다. 4.3 사건보다 먼저 명예회복과 정부 사과가 있어서 4.3 관련 단체에서 2.28 사건의 명예회복 과정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다. 연장선상에서 2018년 4월 2일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과 대만의 [[가오슝시]] 교육국은 [[제주 4.3 사건]]과 2.28 사건에 대한 교류협약을 체결했다.[[https://www.yna.co.kr/view/AKR20180402074400056?input=1195m|#]] * 2.28 사건에 참가했던 대만 본성인들은 중국국민당 정부의 폭압에 저항할 때 저항 메시지를 국민당 쪽이 모르게 일본어로 방송하거나 [[기미가요]] 제창 여부로 본성인과 외성인 여부를 구분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국민당과 외성인을 더 자극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2.28 사건의 이면에는 일제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라는 한계점이 있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일부 있다. 그러나 상술된 개돼지 발언 등으로 볼 때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가 있었다기보다는 대만인이란 정체성이 식민지 시기 및 국민당 독재 시기를 거쳐 형성된 데 따른 것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으로 보인다. 대만일치시기에도 힘들었지만 이후 집권한 외성인들도 만만찮게 자신들을 괴롭혔고 그 결과 [[추억보정]]까지 더해져 차라리 '구관이 명관'이라는 식의 향수로 나타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 타이베이 중정구에는 이 사건을 추모하는 기념공원이 있다. 이름은 '2.28 평화기념공원'.[* 참고로 대구에는 1960년 2월 28일 일어난 [[2.28 학생민주의거]]를 기리는 [[2.28기념중앙공원]]이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asiatoday.co.kr/438866(0)-m400300_27439.jpg|width=100%]]}}} || || 2.28 평화기념공원 || 한국에는 228을 중국어로 발음한 '얼얼바 공원'으로도 알려져 있다. 공원 내에는 2.28 사건을 다룬 전시관과 국립대만박물관이 있다. 이것도 원래는 타이완성립박물관이었는데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성립이 국립으로 바뀌게 되었다. [[국립고궁박물원]]이 중화 문명을 주제로 한다면 국립대만박물관은 타이완 섬 자체의 자연 인문 역사를 주로 다룬다. [[타이베이역]]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고 조금만 발품 팔면 [[중정기념당]] 및 국립대만도서관까지 갈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